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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리 영화 속 ‘가족’이라는 주제의 재구성

by jworldstory 2025. 4. 20.

미나리 영화 관련 사진

2020년 전 세계를 울린 영화 『미나리』는 단순한 이민자 가족의 삶을 넘어서, 오늘날 우리가 '가족'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깊이 있게 묻는 작품입니다. 영화는 미국 남부의 낯선 땅에 뿌리 내리려는 한 한국인 가족의 이야기를 따라가지만, 그 안에는 단지 이민자의 정착기가 아닌, ‘가족의 본질’에 대한 섬세하고 진지한 질문이 담겨 있습니다. 본 글에서는 『미나리』 속 가족 서사가 전통적인 틀에서 어떻게 벗어나고, 그 해체 과정 속에서 어떤 새로운 형태의 가족적 의미가 만들어지는지를 분석해보고자 합니다.

전통적 가족관계의 해체 – 가장과 어머니, 역할의 붕괴

영화의 초반부는 전형적인 ‘가장 중심’의 가족 구조에서 시작됩니다. 제이콥은 가족을 데리고 아칸소 시골로 이주하며, “자신만의 농장을 갖겠다”는 목표를 위해 모든 것을 건 남성 인물입니다. 그는 미국 땅에서 가족을 책임지는 ‘성공한 가장’이 되고자 노력하며, 아이들과 아내를 이끌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냅니다. 그러나 제이콥이 추구하는 가족의 미래는 사실상 ‘자신의 꿈’이자 ‘자기실현’에 가깝습니다. 이민자라는 배경에서, 경제적 성공이 곧 정체성과 자존심으로 연결되기에 그는 자신의 목표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가족은 점차 위기를 맞습니다.

모니카는 제이콥의 이러한 결정과 방식에 강한 불안을 느낍니다. 그녀는 생계 안정, 아이들의 건강, 특히 심장병을 앓는 막내 데이빗의 병원 접근성을 중요시합니다. 그녀에게는 현실이 중요하고, 아이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안전하고 돌봄을 받을 수 있느냐가 핵심입니다. 부부는 같은 목표를 바라보지만, 그 과정에서의 우선순위가 완전히 다릅니다. 이 차이는 영화 속에서 점차 뚜렷한 갈등으로 나타나고, 결국 가족은 위태로운 균형 속에 놓입니다.

아이들 역시 부모의 갈등 속에서 정서적 불안을 겪습니다. 특히 데이빗은 어른들이 감당하지 못하는 감정을 조용히 흡수하고, 그것을 혼자만의 방식으로 해석합니다. 그는 ‘가족’이란 늘 함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의 대화가 줄고, 불신이 깊어지는 모습을 보며 자연스럽게 가족이라는 관계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됩니다. 영화는 이처럼 전통적 의미의 ‘가족’이 현실 속에서 얼마나 쉽게 균열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이상과 실제의 간극을 조명합니다. 아버지는 더 이상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며, 어머니는 단순한 조력자가 아닌 독립된 주체로서 자신의 기준을 갖고 살아갑니다. 가족 내 각자의 역할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언제든 흔들리고 재정의될 수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가족관계의 탄생 – 순자와 데이빗의 관계

전통적인 가족 구성원의 역할이 흔들리는 가운데, 영화는 전혀 다른 방식의 가족 관계를 조명합니다. 바로 할머니 순자와 손자 데이빗의 관계입니다. 순자는 미국 사회에 전혀 동화되지 않은 인물입니다. 그녀는 전통적인 한국 문화와 감각을 지닌 존재로, 서구화된 감성에 익숙해진 손자 데이빗에게는 낯설고 불편한 존재입니다. 데이빗은 처음에 “할머니는 쿠키를 구워야 해”라고 말하며, ‘미국식 할머니’의 이미지를 강하게 투영합니다. 하지만 순자는 그러한 기대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데이빗과 관계를 형성해 갑니다.

이들의 관계는 대단한 사건이나 교육을 통해 형성되지 않습니다. 함께 웃고, 놀고, 미나리를 심으며 조용히 쌓여가는 감정의 결이 그들을 이어줍니다. 순자는 데이빗에게 삶을 가르치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순자와의 관계 속에서 처음으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감정’을 경험합니다. 이는 부모와의 관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정서적 안정감입니다. 순자가 데이빗을 업고 걷는 장면은 그들 관계의 상징적 절정입니다. 몸이 불편한 손자를 위해 자신도 아픈 몸을 이끌고 산길을 오르는 장면은 보호와 사랑의 진짜 본질이 무엇인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데이빗 역시 변합니다. 그는 점차 순자를 받아들이고,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에 안정감을 느끼며 마음을 엽니다. 영화 후반부에 순자가 기억을 잃고 방황할 때, 데이빗이 그녀의 손을 잡고 함께 있어주는 장면은 정서적 가족 유대의 진수를 보여주는 순간입니다. 이 관계는 혈연보다 강하고, 책임보다 진실된 감정을 기반으로 합니다. 가족이란 고정된 틀에서 주어진 역할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돌보려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이들은 몸으로 증명합니다. 『미나리』는 이 관계를 통해 가족이 꼭 피로만 이어지는 것이 아님을, 그리고 가장 가족다운 관계는 때때로 가족 바깥에서 형성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공동체로서의 가족 – 위기 속에서 재건되는 유대

『미나리』의 후반부, 제이콥이 일군 농장이 불타는 장면은 단순한 물리적 파괴가 아닌 상징적 해체의 순간입니다. 제이콥의 꿈, 아버지의 권위, 가장의 책임, 경제적 기반 등 가족을 지탱하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립니다. 이 장면은 절망의 끝처럼 보이지만,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가족이 진짜로 ‘가족’이 되는 전환점입니다. 제이콥과 모니카는 불 앞에서 서로를 탓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함께 불을 끄고, 함께 주저앉습니다. 이 장면은 침묵 속의 화해이자, 실패 속에서 피어난 이해의 순간입니다.

순자는 화재의 원인을 제공했지만, 누구도 그녀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족 모두가 그녀를 보호하고, 데이빗은 그녀의 손을 잡고 함께 앉아 있습니다. 가족이란 단지 경제적 안정이나 기능으로 유지되는 조직이 아니라, 실망과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함께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임을 영화는 강조합니다. 가족은 실패를 경험함으로써 더 강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미나리는 그 상징물입니다.

미나리는 한국에서 가져온 씨앗으로, 아무도 관심 주지 않은 개울가에서 조용히, 그러나 끈질기게 자랍니다. 잡초처럼 퍼지지만, 쓰임도 많고 생명력도 강한 미나리는 이 가족의 모습과 닮았습니다. 비록 환경은 척박하고, 현실은 불안정하지만, 이 가족은 다시 자라나고 다시 뿌리내립니다. 『미나리』는 가족이란 완성된 구조가 아니라, 매 순간 다시 만들어지고 성장하는 살아있는 유기체임을 보여줍니다.

결론

『미나리』는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라는 외피 안에, 현대 사회의 가족 구조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담고 있는 작품입니다. 가장 중심의 권위, 어머니의 헌신, 자녀의 복종이라는 익숙한 틀을 부수고, 이해와 공감, 돌봄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가족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작품은 피로 맺어진 관계보다 정서로 맺어진 관계가 더 단단할 수 있으며, 위기의 순간이야말로 가족이 다시 시작되는 순간일 수 있음을 섬세하게 전달합니다. 영화를 통해 우리 각자의 가족을 다시 돌아보고, 관계의 본질에 대해 고민해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